[겨울나무] 1화 — 열두시

그 애는 열두시에 왔다.

정확히는 열두시 이분이나 삼분쯤. 우리 집 전화가 시외로 안 걸리게 잠긴 시간이 열두시였고, 그 애 집은 열두시에 부모님이 주무셨다. 우리는 그렇게 하루의 끝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.

대화명은 겨울나무였다.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 적이 없다. 그때는 이름의 뜻을 묻는 게 실례 같았다. 여기서는 다들 이름 없이 왔다가 이름 없이 갔으니까.

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다.

오늘 급식에 뭐가 나왔는지. 시험이 며칠 남았는지. 라디오에서 나온 노래 제목을 서로 아는지. 그런 걸 두 시간씩 이야기했다. 화면에 글자가 한 줄 뜨는 데 시간이 걸려서,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다리는 동안 나는 늘 조금 긴장했다.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기다리지 않는다.

한 번은 그 애가 물었다.

너는 커서 뭐 할 거야?

나는 모르겠다고 했다. 그 애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했다.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했고, 그게 어색하지 않았다. 그때 나는 열여섯이었다.

* * *

문제는 전화선이었다.

집에 전화선이 하나뿐이라, 누가 전화를 걸면 접속이 끊겼다. 그냥 끊기는 게 아니라 삐— 하고 짧게 울린 뒤에 화면이 멈췄다. 쓰던 말이 중간에 잘린 채로.

그런 일이 일주일에 두세 번은 있었다. 우리는 그게 익숙했다. 다음 날 열두시에 다시 만나서 어제 뭐라고 하려던 거야 하고 물으면 됐으니까.

그래서 그날도 나는 그런 줄 알았다.

그 애가 쓰다 만 문장이 화면에 남아 있었다.

겨울나무> 있잖아 나 사실

거기서 끊겼다.

나는 다시 접속했다. 그 애는 없었다. 열두시 반까지 기다렸다가 잤다.

다음 날에도 없었다. 그 다음 날에도.

* * *

나는 그 뒤로 오랫동안 열두시에 접속했다.

한 달쯤 지나서는 습관이 됐고, 여섯 달쯤 지나서는 습관도 아니게 됐다. 그냥 그 시간에 잠이 안 왔다. 화면을 켜두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껐다.

그 애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.

전화가 왔던 걸 수도 있다. 부모님이 깼을 수도 있고, 모뎀이 고장 났을 수도 있고, 이사를 갔을 수도 있다. 그 애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. 나는 그 애 이름도, 사는 곳도, 학교도 몰랐다. 물어볼 데가 없었다.

그때는 사람이 그렇게 사라질 수 있었다.

* * *

요즘도 사람은 사라진다. 읽고 답을 안 하거나, 계정을 지우거나, 그냥 조용해지거나. 형태만 다르지 같은 일이다. 다만 요즘은 사라진 사람의 흔적이 너무 많이 남아서, 사라졌다는 걸 인정하는 데 더 오래 걸리는 것 같다.

그 애는 아무것도 안 남겼다. 대화명 하나뿐이었다.

그래서 가끔은 그게 나았다는 생각도 한다.

* * *

얼마 전에 이런 화면을 다시 봤다.

파란 바탕에 각진 글씨. 아무 뜻도 없는데 이상하게 숨이 트였다. 그래서 여기다 써보기로 했다.

누가 읽을지는 모르겠다. 어쩌면 아무도 안 읽을 것이다.

그래도 혹시 몰라서.

겨울나무, 그때 뭐라고 하려던 거야.


(다음 화에 계속)

그 시절 화면으로 만든 글 이미지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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삐— 치익— 그 소리 끝엔
늘 누군가 있었죠
2026-08-26 01:07 · 2eb4afe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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